- 방석순
- 입력 2023.08.08 07:34
- 수정 2023.08.10 06:36
“바라보면 구덕산 정기 흐르고 굽어보는 동해물 진리의 바다~”
피란 시절 부산에서 다니던 대신초등학교 교가입니다. 학교생활은 매일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인 조회 시간 교가 제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교장 선생님 훈화는 듣는 둥 마는 둥 더러는 옆줄에 선 여학생 얼굴 훔쳐보기에 더 바빴습니다.
교실에 들어오면 종일 담임선생님과의 눈싸움이 시작됩니다. 국어, 산수, 사생, 자연은 물론, 심지어는 음악, 미술까지도 담임선생님 몫이었지요. 당시 선생님들은 그야말로 전인교육의 전문가들이었던 셈입니다. 때로 음악이나 미술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선생님들이 서로 반을 엇바꾸어 지도하는 시간도 있긴 했습니다.
그렇게 일 년 내내 온종일 아이들과 씨름하다 보니 선생님들은 대체로 학급 아이들 사정을 꿰뚫고 계신 편이었습니다. 녀석들이 학과를 제대로 익혀 따라오는지, 결석하거나 조퇴하는 이유가 꾀병인지 아닌지, 수업료는 왜 제때 못 내는 건지...
이따금 책상에 머리를 박고 앓는 소리를 내는 아이가 생기기도 합니다. 혹시라도 큰 탈이 날까 봐 반장이나 부반장이 집까지 데려다주곤 했습니다. 선생님 지시로 우체국이나 은행 심부름을 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공부 시간 빼먹는 게 벼슬이라도 얻은 양 즐겁고 자랑스럽던 때라 얼씨구나 교실 문을 박차고 나갔었지요.
5학년 때던가, 단체로 구충제를 복용하던 날이었습니다. 차례로 교탁 앞에 나가 알약 봉지를 받아 약과 물을 먹고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빈 봉지 여러 장이 교실 바닥에 나뒹굴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선생님의 추궁에도 저는 결코 버리지 않았노라고 버텼지요. 몇몇 아이들이 눈치를 보며 제 뒤를 따랐습니다. 떨어진 종이는 있는데 버린 사람이 없다니, 화가 나신 선생님이 회초리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날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손바닥보다 선생님의 불신을 샀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철없던 때라 아이들 대부분이 잘 느끼지 못했지만 6학년을 맡은 선생님들은 아무래도 조금 긴장하는 눈치였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입학시험을 치러야 하던 때였으니까요. 원래 그런 방식이 허용되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0여 명의 아이들이 정규수업 후에도 교실에 남아 담임선생님의 과외지도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별도의 수업료를 내야 했지요.
과외지도를 받지 않는 아이들은 곧장 집으로 가거나 운동장에서 뛰어놀았습니다. 교실에서 과외지도를 받고 나오던 아이들과 그때까지 운동장에서 놀던 아이들은 툭하면 마주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서로 다른 처지에 공연히 샘을 부려 일어나는 다툼이었지요.
정규수업이 끝나 막 교실을 나서려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불러세웠습니다. “중학교 시험이 얼마 안 남았잖아. 이젠 운동장에서 적당히 놀고 공부 좀 해라.” 그러고는 전과수련장 한 권을 주셨습니다. 이전에 제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책이었습니다. 교과 과정에서 익혀야 할 모든 내용들이 실제 시험지처럼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원하던 중학교에 무난히 입학할 수 있었던 건 틀림없이 선생님의 염려 덕분이었을 겁니다.
선생님은 어느 날 칠판에 두 개의 밥그릇을 그려 보였습니다. 하나는 밥이 볼록하도록 가득 담긴 작은 그릇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밥이 보일락 말락 적게 담긴 큰 그릇이었습니다. “지금 너희들 작은 머릿속에 담긴 것을 자랑하지 마라. 머리를 더 크게 키워서 더욱 많은 것이 담기도록 해야 한다.” 선생님의 그 말씀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습니다. 비록 선생님이 기대하신 정도의 큰 그릇은 되지 못했어도 그나마 사회생활을 그르치지 않고 살아온 것 역시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피란 시절 부산에서 다니던 대신초등학교 교가입니다. 학교생활은 매일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인 조회 시간 교가 제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교장 선생님 훈화는 듣는 둥 마는 둥 더러는 옆줄에 선 여학생 얼굴 훔쳐보기에 더 바빴습니다.
교실에 들어오면 종일 담임선생님과의 눈싸움이 시작됩니다. 국어, 산수, 사생, 자연은 물론, 심지어는 음악, 미술까지도 담임선생님 몫이었지요. 당시 선생님들은 그야말로 전인교육의 전문가들이었던 셈입니다. 때로 음악이나 미술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선생님들이 서로 반을 엇바꾸어 지도하는 시간도 있긴 했습니다.
그렇게 일 년 내내 온종일 아이들과 씨름하다 보니 선생님들은 대체로 학급 아이들 사정을 꿰뚫고 계신 편이었습니다. 녀석들이 학과를 제대로 익혀 따라오는지, 결석하거나 조퇴하는 이유가 꾀병인지 아닌지, 수업료는 왜 제때 못 내는 건지...
이따금 책상에 머리를 박고 앓는 소리를 내는 아이가 생기기도 합니다. 혹시라도 큰 탈이 날까 봐 반장이나 부반장이 집까지 데려다주곤 했습니다. 선생님 지시로 우체국이나 은행 심부름을 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공부 시간 빼먹는 게 벼슬이라도 얻은 양 즐겁고 자랑스럽던 때라 얼씨구나 교실 문을 박차고 나갔었지요.
5학년 때던가, 단체로 구충제를 복용하던 날이었습니다. 차례로 교탁 앞에 나가 알약 봉지를 받아 약과 물을 먹고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빈 봉지 여러 장이 교실 바닥에 나뒹굴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선생님의 추궁에도 저는 결코 버리지 않았노라고 버텼지요. 몇몇 아이들이 눈치를 보며 제 뒤를 따랐습니다. 떨어진 종이는 있는데 버린 사람이 없다니, 화가 나신 선생님이 회초리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날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손바닥보다 선생님의 불신을 샀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철없던 때라 아이들 대부분이 잘 느끼지 못했지만 6학년을 맡은 선생님들은 아무래도 조금 긴장하는 눈치였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입학시험을 치러야 하던 때였으니까요. 원래 그런 방식이 허용되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0여 명의 아이들이 정규수업 후에도 교실에 남아 담임선생님의 과외지도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별도의 수업료를 내야 했지요.
과외지도를 받지 않는 아이들은 곧장 집으로 가거나 운동장에서 뛰어놀았습니다. 교실에서 과외지도를 받고 나오던 아이들과 그때까지 운동장에서 놀던 아이들은 툭하면 마주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서로 다른 처지에 공연히 샘을 부려 일어나는 다툼이었지요.
정규수업이 끝나 막 교실을 나서려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불러세웠습니다. “중학교 시험이 얼마 안 남았잖아. 이젠 운동장에서 적당히 놀고 공부 좀 해라.” 그러고는 전과수련장 한 권을 주셨습니다. 이전에 제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책이었습니다. 교과 과정에서 익혀야 할 모든 내용들이 실제 시험지처럼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원하던 중학교에 무난히 입학할 수 있었던 건 틀림없이 선생님의 염려 덕분이었을 겁니다.
선생님은 어느 날 칠판에 두 개의 밥그릇을 그려 보였습니다. 하나는 밥이 볼록하도록 가득 담긴 작은 그릇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밥이 보일락 말락 적게 담긴 큰 그릇이었습니다. “지금 너희들 작은 머릿속에 담긴 것을 자랑하지 마라. 머리를 더 크게 키워서 더욱 많은 것이 담기도록 해야 한다.” 선생님의 그 말씀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습니다. 비록 선생님이 기대하신 정도의 큰 그릇은 되지 못했어도 그나마 사회생활을 그르치지 않고 살아온 것 역시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 MBC 관련뉴스 화면 캡쳐
최근 서울 양천구의 한 초등학교 6학년생이 담임교사에게 욕설하고 얼굴과 몸에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 전에 부산의 한 초등학교 3학년생이 여교사의 얼굴을 때리고 몸을 발로 찼다는 뉴스도 보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빤히 보는 가운데. 아이들의 행실에서 그 부모들의 됨됨이를 짐작할 듯합니다. 예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들이 요즘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급기야 서울 서이초등학교에서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까지 벌어졌습니다. 일기장에 남긴 “업무폭탄+OO(학생 이름) 난리가 겹치면서 그냥 모든 게 다 버거워지고 놓고 싶다”는 문구가 숨진 교사의 암울했을 날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학생과 학부모가 선생님을 불신하고 무시하고, 선생님이 학생을 무서워하고 멀리하는 나라. 이런 교육 현장을 가진 나라에 미래가 있을까요? 교권 확립과 교육 문화 창달에 기여한다는 한국교총의 생각은 어떤가요? 교육의 민주화, 참교육 실현을 외쳐온 전교조의 생각은 어떤가요? 그 좋은 명분을 내세우고도 구성원의 명단을 감추는 속내는 또 무엇인가요? 학생들의 인권을 지키겠다며 학생인권조례를 만든 교육감들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교권 확립과 상충되는 요소는 없었을까요? 민주, 혹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혹시 우리 사회가 무질서와 무례의 아편에 길들여져 가는 것은 아닐까요? 때때로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인권 보호가 우선되는 기현상을 보면서 설익은 민주주의의 병폐에 한탄하게 됩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의 불행한 뉴스를 듣고 볼 때마다 배는 고팠지만 참으로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귀한 말씀으로, 따끔한 회초리로 좋은 가르침을 주셨던 고마운 선생님들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 칼럼은 논객닷컴과 자유칼럼 그룹간의 전재 협약에 따라 게시된 글입니다.
방석순 nongaek34567@daum.net
출처 : 논객닷컴(http://www.nongaek.com)
학생과 학부모가 선생님을 불신하고 무시하고, 선생님이 학생을 무서워하고 멀리하는 나라. 이런 교육 현장을 가진 나라에 미래가 있을까요? 교권 확립과 교육 문화 창달에 기여한다는 한국교총의 생각은 어떤가요? 교육의 민주화, 참교육 실현을 외쳐온 전교조의 생각은 어떤가요? 그 좋은 명분을 내세우고도 구성원의 명단을 감추는 속내는 또 무엇인가요? 학생들의 인권을 지키겠다며 학생인권조례를 만든 교육감들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교권 확립과 상충되는 요소는 없었을까요? 민주, 혹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혹시 우리 사회가 무질서와 무례의 아편에 길들여져 가는 것은 아닐까요? 때때로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인권 보호가 우선되는 기현상을 보면서 설익은 민주주의의 병폐에 한탄하게 됩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의 불행한 뉴스를 듣고 볼 때마다 배는 고팠지만 참으로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귀한 말씀으로, 따끔한 회초리로 좋은 가르침을 주셨던 고마운 선생님들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 칼럼은 논객닷컴과 자유칼럼 그룹간의 전재 협약에 따라 게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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